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리처드 1세|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 그리고 [[킹 메이커]] [[발리앙 디블랭|발리앙]] ==== *''' 이사벨 1세 & 앙리 1세 ''' 이 일련의 일의 배후에는 발리앙 디블랭이 있었다는 것은 리처드 1세도 알고 있었다. 발리앙과 리처드 사이는 이후로 급속히 가까워져, 살라흐 앗 딘과 친분이 있고 아랍어에도 능통하며 현지 사정에 밝은 발리앙을 이슬람과의 회담에 통역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 통역은 리처드의 신뢰만 받은 게 아니라 적인 살라흐 앗 딘 역시 발리앙의 역량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복잡한 일들이 정리되자 1192년 봄, 다시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 그런데 본국 영국에서 비보가 전해진다. 리처드가 성지로 향하기 전 재상으로 임명한 윌리엄 드 롱챔프의 친필 편지를 지참한 헬퍼드의 수도원장이 찾아온 것이다. 편지 내용에는 성지를 떠난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막내 동생 존을 전면에 내세워 프랑스 왕의 군대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 영국까지 침공하고 있으며, 이미 리처드와 존을 각자 지지하는 두 세력으로 본국의 국론이 분열되었고, 리처드 파와 자신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당신의 귀국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리처드는 코앞의 예루살렘에서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몇 달 더 전투에 임했으나 진퇴를 반복할 뿐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온 이슬람 군대가 리처드를 막기 위해서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은 쉽게 깰수 있는 휴전이 아닌 양쪽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강화를 맺기로 한다. 이슬람의 성직자 이맘들은 사정이 급한 건 본국 안방이 침략당하는 서방 세계의 리처드지 이슬람이 아니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살라흐 앗 딘은 오히려 젊은 35세의 리처드와 54세의 자신 살라흐 앗 딘의 나이를 언급하며 시간이 꼭 나의 편이 아니라고 누가 본인 이후로 이렇게 이슬람을 통합할 수 있겠느냐고 역설하며 반발을 잠재웠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의 처지를 동정이라도 하듯 곧바로 교섭을 시작했다. 8월 4일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이 야퍄를 직접 방문했다. 리처드도 이미 모든 적대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알 아딜은 12세인 자신의 큰아들(훗날의 [[알 카밀]])을 데리고 왔다. 리처드는 이 아랍 소년의 예의 바르고 활발한 호기심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교섭 중간에 소년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했다. 아버지 알 아딜의 앞에서 리처드는 자신의 검을 꺼내어 어깨를 치며 알 카밀을 기사로 봉했다. 회담의 결과는 간략히 말해 1조항 '예루살렘은 이슬람에 속한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지 순례를 보장한다.'였다. 이맘들은 반대했지만 살라흐 앗 딘의 실용주의로 보자면 종교적인 관용이 아닌 경제적인 고려도 포함됐다고 할수 있다. 성지 순례는 일종의 거대한 관광 산업이었다. 2조항은 '무사했던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과 3차 십자군에게 점령된 티루스에서 야파까지 팔레스티나 지방의 바다 쪽은 대부분 십자군 국가의 땅으로 한다.'였는데 육지 안쪽을 가득 메운 기사단들의 성채도 순례자의 보호를 위해 유지하는 것까지 인정했다. 구호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은 이후로도 성지에 머물며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곧이어 다른 잡다한 3조항까지 모두 합의를 끝낸 리처드 1세는 1192년 10월 9일 아크레 항구를 출발하여 유럽 본국으로 돌아갔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 1세가 탈환한 해안가 지역을 기독교도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그 중에서 아크레 외곽의 케이몽(Caymont)과 그 인근 지역을 발리앙의 영지로 인정해주었다. 앙리 1세의 고문 역할을 맡아서 왕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발리앙은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 된 그해 1193년에 사망하였다.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살라흐 앗 딘도 체력이 나날이 쇠해졌다. 자신이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는지 1193년 3월 4일 아침, 이슬람에 절대적으로 위협을 끼치던 리처드가 겨우 성지를 떠난 지 5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3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큰 전공자이자 피해자인 사자심왕은 영국으로 귀환하다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독일에서 포로가 되어 우여곡절 끝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동생을 어쩔 수 없이 용서하고 다른 반란 세력을 제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이 없게도 1199년 리모주 자작령에서 작은 반란을 진압하다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게 된다. 즉사는 하지 않았고 결국 반란을 진압하여 자신을 저격한 어린 소년을 찾아내고 도리어 용감하다고 칭찬하며 치켜세우는 사자심왕다운 대범함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리처드는 밤중에 사망하게 되고, 분노한 부하 기사들이 그 어린 소년을 끌고 나와 고기 다지듯 난도질하여 죽여버린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사자가 개미에게 물려 죽은 사건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중요 인물들이 역사에서 퇴장하고 이후로 26년간 살라흐 앗 딘의 조카 알 아딜이 죽기까지 큰 평화는 유지된다. 이사벨은 젊은 프랑스 기사 앙리와의 결혼 시점에서 죽은 전남편 코라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일단 재혼인 결혼식이 전 남편의 사망일로부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기에 일부에서는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전시 상황에서 통치력이 전무한 어린 여왕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얻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또한 프랑스 서부와 영국을 걸쳐서 앙주 제국을 세운 앙주 가문과 분가되어 나온 플랜태저넷 가문의 지지를 받는 이사벨과,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의 지지를 받는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 블루아 가문의 앙리의 결혼은 서유럽의 두 거대 파벌의 적대 관계의 종식에도 도움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벨은 암살당한 전남편 코라도의 딸이자 나중에 예루살렘의 여왕이 되는 마리아를 낳았다. 앙리와 이사벨 사이에서는 마리(요절)와 알릭스, 필리파 세 딸이 태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